나는 어떤 개발자가 되고 싶은가

@VERO
Created Date · 2023년 10월 23일 11:10
Last Updated Date · 2023년 11월 16일 12:11

태양 가까이 날면 위험해, 이카로스.

넌 앞으로 뭘 하고 싶어?

지금은 부끄럽지만, 나에게는 그런 자부심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큼은 잘할 수 있다.

하지만 좋아하는 걸 찾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주위의 누군가 물어보던 "넌 앞으로 뭘 하고 싶어?"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게 가장 힘들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 갈증이 있었다.

좋아하는 걸 뭐라도 찾고 싶다. 진짜로 열심히 할 텐데.

그렇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채로,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사람들이 물어보던 질문이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 때쯤, 난 "계속 공부를 하고 싶다" 라는 두루뭉술한 대외적 답변을 하나 준비했다.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이게 정말 하고 싶은 게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어도 애써 무시했다. 남들 다 있는 목표 하나 없는 사람이 되는 건 싫다는 소심한 자존감 때문이었다.

그저 그런 생각만으로 왜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었던 고등학교 1학년, 나는 동아리의 구석 자리 선배들의 컴퓨터 속 고양이 게임에 매료되었다.

움직이는 고양이

별것도 아니었다. 고양이가 하늘을 날고, 사과를 먹으니 점수가 올랐다.
선배들은 그 조그만 화면을 보면서 웃기다며 깔깔댔다.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 해보고 싶다.

동아리에 들어가서 선배들이랑 간단한 게임도 만들고, 대학교 MOOC 강의도 들어봤다. 수능 공부할 시간을 쪼개 C언어를 공부했고, 주말에도 앱을 만들러 전남대학교에 갔다. 잠이
많은 내가 컴퓨터와 함께할 때면 자야 한다는 걸 잊을 만큼 재밌었다.

그때 정했다. 나는 프로그래머가 되어야겠다고.

순전히 재미 때문에 컴퓨터 공학과에 진학했고, 대학교에 가면 관련 공부만 할 생각에 즐거웠다.
하지만 그때도 몰랐다. 프로그래머도 여전히 막연한 목표였다는 걸.

나는 밀랍 날개를 달고, 내가 새인 줄 착각했다.

으레 다른 사람들이 꿈꾸듯, 나도 '서비스로 세상에 기여하는 개발자'가 되고 싶었다.
'서비스로 세상에 기여하는 개발자'라는 태양은 태양이란 게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던 내게도 아름다워 보였다.
그 꿈은 어찌나 드높은지, 모두가 우러러보는 길이었다.

갈 길이 멀었다.
난 호기롭게 날아올랐다. 태양을 향해.

그저 전공 공부만 하면 개발 실력이 늘 거로 생각했다.
그저 뭔가를 만들 수만 있다면 그 꿈에 다가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왜인지 계속 제자리에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하고 있는 게 뭐지?"
"왜 이런 공부를 하고 있을까?"
"이렇게 하면 정말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 수 있을까?"
"잘 공부하고 있는 걸까?"

이런 답도 없는 막막한 고민을 하게 될 때쯤, 내 앞에 먼저 날아간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들은 멀리 있었고, 난 조급해졌다. 그렇지만 먼저 출발한 그들을 따라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했고, 원하던 목표는 단기간에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난 당장 태양을 향해 가고 싶었다.
태양은 드높은데, 내 날개는 밀랍이 녹아 듬성듬성했다.
날아가는 고된 과정에서 아등바등하는 상황이 참 싫었다.
열정도 체력도 고갈된 나는 그렇게 추락했다. 바다로.

바다. 그리고 파도

바닥난 자존감과 함께 추락한 바다는 추웠다. 그땐 처음으로 내가 "못하는 사람"이라고 느낀 순간이었다.
한동안 떠다니기만 했다. 좋아하는 것도 못 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못 할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그 당시 공부하던 알고리즘만 봐도 불안했다. 문제를 풀다 막막해서 울던 날도 많았고, 하고 있던 일만 억지로 마칠 수 있었다.
그러다 우테코 공고를 보게 됐다. 여기서라면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힘들었지만, 겨우겨우 일어나서 프리코스를 했다. 정말 운이 좋게도, 다시 파도에 떠밀려 우테코에 올 수 있었다.

함께 날자

우테코는 신기했다. 주변의 크루들과는 경쟁하지 않아도 됐다. 서로가 서로의 동료이자 선생님, 길잡이였다.
앞에 날아가고 있던 새들도 나처럼 날갯짓하는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이상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두를 이기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난 여전히 검은 화면에 올라오는 흰색 글자들을 사랑한다.
크루들과 토론하는 시간, 끝없는 에러를 고치는 과정도 언제나 즐겁다.

이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즐겁게 개발하는 개발자가 되고 싶다!
막연한 목표로 향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정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쩔 수 없는 숙명인지, 태양을 좇고 싶다. 하지만 목표까지 가는 길이 힘들어도 이제는 괜찮다. 옆에서 같이 날아줄 사람들이 많으니까. 내가 추락하기 전에 잡아줄 거다.
앞서가는 사람들의 존재도 지금은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날고 싶다.
앞지르는 건 중요하지 않다. 내 페이스에 맞춰 가기만 하면 된다.

오늘도 날개를 고쳐 맨다. 태양열에 내 열정이 녹아내리지 않게.
태양은 드높아도, 가는 길이 재밌으니까.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