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는 부러질 수 밖에

@VERO
Created Date · 2025년 03월 06일 21:03
Last Updated Date · 2025년 05월 29일 21:05

나는 자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손 벌리지 않을 거라고. 오롯이 나 혼자서 해낼 수 있다고. 이제와 생각하면 축복일지 저주일지 모를 능력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던 사람은 언제나 나였고, 노력한 것에 비해 결과는 지나치게 좋았다.

나는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 의심 많은 불손한 마음으로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벌하지 않는 신을 믿을 수 없었기에, 누구에게도 전가해 버리지 못한 십자가들을 나 혼자 짊어멨다. 버릴 수 없는 내 몫이었다.

‘안 되면 그냥 죽지 뭐’ 내 지나친 자기 과신은 오로지 인생 종료 버튼 하나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 나는 줄곧 죽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내게 두려웠던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존재의 공허였다. 가진 자들이 가진 것, 많은 사람들이 이루고자 하는 것, 성공의 척도로 간주되는 모든 것들에 흥미가 없었다. 가장 괴로운 질문은 ‘그렇다면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였다. 그리고 답을 찾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메아리처럼 멤돌았다. 그것은 작은 부표가 풍랑에 휩쓸리듯 쉽게 잊혔다가, 파도가 잠잠해지면 어김없이 다시 떠올랐다. 잊었을 땐 여느 사람들처럼 미친듯이 속세의 가치들을 좇다가, 벼락같이 그것이 떠오른 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끝나지 않는 공허를 끝내기 위해 급하게 휘갈겨 쓴 답안지들에 비가 내렸다. 전부 오답일 걸 알면서도, 제발 뭐라도 내 삶의 목적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발악이었다. 나는 차라리 나를, 내 인생을 속이고 싶었다.

덤처럼 주어진 인생이었다. 정말로 ‘여분’처럼 살고 있었다. 결단을 내리지도 못한 채로 이도저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저 떠밀리듯 누군가의 삶의 목적을 마치 내 것인 양 포장하며, 이제야 진정으로 내 목적을 찾았다고.

애석하게도 인생의 가장 젊은 시절을 살고 있는 나에게 남은 시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끝이 정해지지 않은 백 년, 혹은 이백 년 남짓한 시간. 나는 그 시간들에 숨이 막혀서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 다른 것은 단순히 마음가짐이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단지, 지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을 지금 답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내가 죽는 날 까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다면 죽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유가 없이 ‘살면’ 되는 거다. 단지 죽음을 유보할 뿐이다. 미래로.

더 이상 과거의 나를 불신하고 원망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나간 것은 어떻게 해서든 다시는 돌릴 수 없고, 가장 최선의 선택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을 믿는 것이다. 나를 믿는 것이다. 진창에 넘어졌다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나의 실수를 자책하고, 진창이 너무 더럽다며 짜증부리며 계속 엎어져 있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것뿐이다. 넘어진 나를 일으켜 줄 사람이 있더라도, 손을 잡고 힘을 주는 것은 결국 나다. 끔찍한 그 순간에 평생 머무를 지, 떠날 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 자신이다.

세상은 그럼에도 아름답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모두 여기 있다. 한바탕 비가 오다가도,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햇빛이 들면, 모든 것이 쓸려 나간 곳에서 또 다시, 죽지 않고 살 거다. 내일 모레도 천둥 번개가 치더라도.